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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수
    2019. 9. 20. 02:00

    이제 한 주 후면 3학기가 끝나고 2주 방학에 들어간다. 이번 학기에는 두 반의 영어과목을 맡게 되었다. 두 반 중 한 반은 11명이었다가 2명이 갑작스레 귀국을 하는 바람에 9명이 되었다. 전교에서 가장 작은 반이다. 거기다가 남학생 3명이 다들 순둥순둥 한 모범생이고 나머지 여학생들도 열심히 공부하는 편이라 면학 분위기는 내 교사 인생 역대 최고이다. 지금까지 영어를 거의 못하고 때로는 가만히 앉아있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기초반 아이들을 주로 가르친 내게는 꿈만 같은 반이다. 

     

    유일한 단점이 있다면 어떤 수업을 계획해도 너무 빨리 끝내버려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총동원해야 한다는 것. 교사로서는 사치스러운 고민이긴 하다. 회화가 좀 되는 학생들만 시도할 수 있는 가족 오락관 스타일의 '스피드 게임'을 하던 중이었다. 반 학생들을 두 팀으로 나누어서 간단한 단어들을 자신의 팀원에게 설명을 해서 맞추게 하는 게임인데 뒷짐을 져서 손동작을 전혀 쓰지 못하고 말로만 설명을 해야 한다. English라는 단어가 있다면, 'What subject are we stuyding now?'라고 질문을 해서 그 단어를 유도하는 식이다. 게임에 익숙해지고 나서는 학생들에게 상대편이 설명할 단어들을 적어서 내게 했지만 첫 게임에서는 내가 쓴 단어들을 맞추게 했다. 처음이라서 homework, lunchtime, toilet 등등 간단한 단어들 뿐이었는데 게임 중에 나를 깔깔 웃게 만든 순간들이 몇 번 있었다. 

     

    단어는 'love'였다. 'What's between a boy and a girl?' 나쁘지 않은 설명이었다. 그 설명에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학생들의 대답이 너무 귀여웠다. 'A table?' 'Friendship?' 소년과 소녀 사이에 있는 것이 책상이고 우정이라니! 맞는 소리이긴 하다. 학생들은 같은 반 남학생과 여학생 사이에 뭐가 있나 교실을 둘러보다가 대답한 것 같았다. 13살, 14살의 때 묻지 않은 영혼들의 생각의 한계 안에서는 아직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모양이다. 

     

    'TV'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였다. 'What do you do after school?' 뭐, 약간 막연하지만 역시 나쁘지 않은 설명. 여기에 나온 대답이 또 엄청 순수하다. 'Homework?' 'Reading books?' 방과 후에 뭘 하긴, 숙제하고 책 읽어야지 ㅋㅋ 요즘은 TV를 잘 안 보긴 한다지만 게임을 한다거나 친구랑 논다는 대답도 안 나왔던 것 같다. 아이들도 나중에 단어를 알고 나서 같이 웃었는데 내가 배를 잡고 웃는 이유는 아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학기의 마지막 두 주는 팀을 구성해서 그림책을 만들고 있다. 책이라기보다는 소책자에 가깝지만 서로 영어로 소통하면서 작문도 해야 해서 쉽지 않은 작업이다. 20년 후 미래에 팀원들과 재회했을 때를 상상해서 이야기를 만드는데 꼭 나를 넣어야 하는 조건이었다. 건축가가 된 학생이 집도 설계해주고, 의사와 간호사가 된 학생들이 치료도 해준다. 주름이 많은 할머니로 등장하지만, 이런 미래라면 교사로서 꽤 만족스러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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