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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걷기 - Wollongong 에서 Woonona까지 바닷가 걷기
    건강 2020. 1. 4. 12:15

    2019년 12월 22일 일요일. 휴가의 시작. 가장 하고 싶었던 바닷가 걷기를 하러 Wollongong에 갔다. 유난히 힘들었던 2019년을 보내기 전에 내 속의 먼지와 잡념을 떨쳐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걷고 또 걷다 보면 왠지 괜찮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NSW 기차 노선표. 일요일에는 동일 요금으로 꽤 멀리 갈 수 있다.

    전에 울릉공 바닷가에서 몇 시간 머물었던 적이 있었다. 혼자 바닷가에 앉아서 바람을 맞으며, 서핑하는 사람들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워졌었다. 그때는 울릉공 등대 근처만 잠깐 걸었었는데 나중에 구글 맵을 보니 해변가가 길게 이어져있다는 걸 알게 됐다. 

    구글 맵으로는 3시간 거리

    일요일은 $2.80 동일 요금으로 꽤 멀리까지 갈 수 있다. 대신 배차간격이 길어서 시간계획을 잘해야 한다. 나의 저질 체력을 고려해서 방전이 되면 중간에 가까운 역에서 기차를 타고 집에 가려고 보니 Woonona역이 해변가에서 가장 가까웠고 배차 시간도 매 시간 40분으로 일정했다. 구글 맵에서는 3시간으로 나왔지만 내가 시속 15킬로로 걷진 못하니 시간을 넉넉하게 잡았다. 12시 정도에 출발해서 오후 5시 전 후까지 한 5시간 정도 걸으면 성에 차겠지 싶었다. 중간에 먹을 수 있도록 물과 간식도 많이 챙겼다. 

    울릉공 역 근처의 교회에서 10시 예배를 드렸다. 사실 당시에는 교회에 가기만 하면 눈물이 나서 교회 가기가 싫었다. 예배가 은혜로워서, 신앙심이 깊어서 눈물이 나는 게 아니라, 그냥 마음이 힘들어서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하지만 예배를 빠지면 왠지 찜찜할 것 같은 강박감 때문에 교회를 찾았다. 그날은 감사에 대한 성도들의 간증을 듣는 순서가 있었는데, 나이지리아에서 온 어떤 분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느꼈던 바다같이 깊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모든 것을 둘러싸는 엄청난 바다. 그런 광대한 바다 같은 사랑이라니 나도 느껴보고 싶었다. 이 간증을 듣기 위해 울릉공에 온 것인가도 싶었다. 

    예배를 마치고 화장실에 가기 위해 울릉공 쇼핑센터에 들렸는데 바람이 꽤 세고 쌀쌀했다. 반팔에 긴팔을 입고 또 얇지만 바람막이도 입었는데 꽤 추웠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연한 하늘색 체크 스카프를 하나 사서 목에 둘렀다. 쇼핑센터를 나와서 좀 걷다가 갑자기 색을 바꾸고 싶어서 돌아갈까도 싶지만 간신히 참았다. 언제가 되면 내가 원하는 걸 확실히 알고 빨리 결정할 수 있게 될까? 

    울릉공 바닷가에 도착하니 멀리 등대가 보였다. 등대를 지나서 계속 바닷가를 따라 걷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처음에는 흰모래를 뽀드득뽀드득 밟는 감촉이 좋아서 마른 모래사장 위를 걸었는데 점점 힘들어졌다. 나중에서야 파도가 들어왔다가 나가는 젖은 부분의 모래사장이 단단해서 걷기 좋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차가운 바닷물에 바지가 젖는 게 귀찮을 까 봐 물에 가까이 가지 않았는데, 왠지 나의 삶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를 상징하는 것 같아서 뜨끔했다. 물에 좀 젖으면 어떤가? 모험도 좀 하고, 귀찮은 일도 감수하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난 너무 안전하게만 살고 싶어 했다. 

    쌀쌀한 날씨에 바닷가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흐린 하늘이었지만 탁 트인 공간이 주는 자유함에 가슴이 뻥 뚫린 듯 시원해졌다. 바람 소리, 파도 소리, 발 밑의 모래의 감촉, 온몸을 감도는 바닷바람. 내 모든 오감이 바다와 바람에 둘러싸여 있었다. 

    쨍한 파란 하늘도 좋아하지만 햇볕이 뜨겁지 않은 흐린 하늘도 좋았다. 뽀얀 모래와도 잘 어울렸다. 짙은 녹색의 바닷물도 나쁘지 않았다.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는 색감이라 고맙기까지 했다. 힘든 내 옆에서 행복해하는 눈치 없는 친구처럼, 내 마음속은 흐린데 하늘과 바다가 너무 행복한 하늘색에 에메랄드 빛이라면 좀 얄미운 맘이 들지 않을까? 

    생각보다 등대를 지나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모래사장의 마르고 뽀득뽀득한 부분을 밟고 다녀서 속도가 느렸다. 

    해변을 따라 걸어갈수록 사람이 점점 적어졌다. 어느 지점에서는 앞 뒤로 내 시야에 아무도 없었다. 바닷가가 다 내 차지가 된 것 같아서 신이 나서 막 뛰기도 하고 노래도 불렀다. 그러다가 문득 여기서 무슨 일이 생겨도 아무도 모르겠다 싶어서 조금 무서워지기도 했다. 바닷가에 해초류가 많이 밀려오는 곳이나 바위가 많은 곳은 역시 인적이 드물었다. 한 참을 가다 보니 바닷가에 검은 자국이 있어서 처음에는 해초가 잘게 부서진 조각들인 줄 알았는데 만져보니 잿가루였다. 요즘 심각한 NSW주 전역의 산불에서 날아온 재들이 바닷가에 떨어져서 이렇게 바닷가까지 밀려온 것이었다. 역대 최악의 산불이라는 게 실감이 나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점점 하늘이 흐려지고 바람도 조금 세졌지만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걸으면서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왜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건지, 날 괴롭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게 뭐든 전부 훌훌 털어내고 싶었다. 그러다가 한참은 아무 생각 없이 걸었던 것 같다. 그냥 눈 앞에 펼쳐진 바다를 보고,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바람에 몸을 맡겼다. 그러다 보니 내가 가진 고민들이 점점 작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큰 바다에 비하면 난 정말 작은 존재구나 하는 마음도 조금 있었지만 내가 하찮은 존재라는 겸손함이나 비굴함은 아니었다. 그저 내가 자연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고나 할까. 걸으면서 다리가 점점 아파질수록, 피곤해질수록, 가져온 간식이 점점 줄어들어서 등에 맨 가방이 가벼워질수록, 이상하게도 마음은 점점 가벼워졌다. 그 대신 가슴은 행복 비슷한 정체모를 뿌듯함으로 벅차올랐다. 다 괜찮아질 거야. 지금 이대로 충분해. 근거 없는 평온함이 내 마음을 채웠다. 

    울릉공까지 기차를 타고 갔다가 다시 집에 오는 길에 읽은 책 속에 자신 방어기제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상처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위험이 감지되면 움츠러들고 피해서 숨어버리는 나의 모습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바닷가에서 발에 물이 묻는 것도 피하려던 나. 이제는 발 정도는 담그고 싶다. 나중에는 물에 풍덩 들어가서 온 몸이 젖어도 깔깔거리며 웃을 수 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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