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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 짧은 행복단상 2019. 10. 17. 02:00
'고양이가 침을 흘리는 것은 절대 정상이 아닙니다. 당장 병원에 가세요' 라는 글귀를 읽고서야 동물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다음날 저녁에 예약을 할 수 있었다. 평소에 치매와 노화의 징조가 보이기는 했지만 심해보이지는 않았는데 최근 몸에 뭔가를 많이 뭍히고 다니는게 신경이 쓰이긴 했다. 알고 보니 침을 줄줄 흘리고 다녀서 발과 몸에 다 뭍었던 것이었다. 난 그건 것도 모르고 작년에 빠진 이빨들 사이로 침이 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넘겨버렸다. 인터넷에 검색을 하다가 위에 글귀를 읽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의사는 오스카를 보더니 금새 표정이 안좋아졌다. 의사가 손가락으로 오스카의 입을 벌리니 그제서야 심각한 상황의 잇몸이 보였다. 왜 난 몰랐던 걸까? 의사는 의자에 앉으라고 권했다.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수술도 소용이 없고 빠른 시일내에 안락사를 하는 것이 오스카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이라고 했다.
올 해 초부터 내 정신은 온통 나 자신에게만 쏠려있었다. 직장에서의 번아웃, 갑자기 찾아온 인생에 대한 회의감. 그런 것들을 극복하고자 자기계발 책들을 읽고 팟캐스트를 듣고 운동을 했다. 중국어도 배우기 시작하고 최근에는 이 블로그도 시작했다. 하루 하루를 활기차게 살기 위해서 자전거를 타러 하루 종일 쏘다니기도 했다. 오스카가 점점 안좋아지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다면 알아챘을까? 조금만 더 경제적 여유가 있었다면 더 좋은 사료를 먹이고, 더 자주 동물병원에 갔으면 알아챘을 수 있었을텐데. 몇 개월전에 오스카의 발톱이 살에 박혀서 병원에 갔었는데 평소 의사선생님이 아닌 다른 분이 봐주셨다. 손톱깎기로 발톱을 잘라낸 비용이 너무 비싸게 느껴졌다. 평소의 의사 선생님이였다면 오스카의 변화를 눈치채지 않았을까? 내가 좀 더 침착하게 오스카의 건강 상태를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면 알아챘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후회가 몰려온다. 미한한 것 투성이다. 돈을 너무 아꼈다. 세심하게 돌보지 못했다. 사랑한다고, 나의 가장 소중한 보물 덩어리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오스카가 서서히 말라가는 걸 신경쓰지 못했다. 몸무게를 재니 평소보다 1키로나 빠져있었다. 조금 가벼워졌다고 생각했는데 1키로나 빠진 걸 보고 너무 놀랐다. 나의 무심함과 둔함이 징그럽게 싫다.
15살 짧은 묘생. 그냥 옆에 있어주기만 하면 되는데. 너무 짧다. 기네스 북 최장수 고양이들이 30년도 넘게 살길래 오스카는 최소한 20년, 어쩌면 25년도 살꺼라고 막연히 기대했었다. 너무 짧다. 행복이 컸고 진했던 만큼 앞으로 흘려될 눈물이 많을 것을 안다. 안락사는 절대 선택하고 싶지 않지만 이제서야 보이기 시작한다. 오스카의 숨소리가 조금 거칠어져 있다. 혼자 있기 좋아하고 걸음걸이에 힘이 하나도 없다. 고양이는 아픈 티를 전혀 내지 않는다고 한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공격의 타켓이 되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보여줘도 되는데.
많이는 아니지만 열심히 자기 계발서들을 읽었다. 목표를 세우고 집중하자. 일상에서 즐거움을 찾자. 우선순위를 세우고 너무 많은 일을 하지 말자. 한 가지 일도 충분하다..... 다 도움이 되고 좋은 내용이었다. 실천하는 중이었고 내 마음의 변화도 느꼈다. 그런데 이제는 모든게 다 헛된 것 같다. 오스카랑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독서든 운동이든 중국어 공부든, 뭐를 해도 죄책감이 든다. 이 시간에도 오스카는 서서히 작아지고 있는데 난 뭘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것 같다. 당연한 일상이었던 드라마나 애니도 보지 못하겠다. 나만 즐거울 수가 없다. 화면에 눈을 떼지 못하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 그 시간에 오스카의 침을 닦아주고, 한 번이라도 더 만져줘야 한다. 모든 일상을 멈출 수는 없겠지만 그냥 곁에라도 있고 싶다. 오스카가 혼자 있고 싶어해도 멀리서라도 지켜 보고 싶다. 그 누구도 원망할 수 없다. 난 동물을 키울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 오스카는 15년이나 버텨주었다. 고마웠고 행복했던 모든 순간들만 떠올리고 싶지만, 내 부족했던 사랑만 자책하게 된다. 너무 힘들어하지 않도록, 보내줘야 할 때를 결정하는 것도 포함해서, 마지막이나마 진정한 사랑을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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