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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투시오 봉쇄 수도원 - 침묵과 고독단상 2020. 1. 1. 14:08
최근에 인터넷에서 봉쇄수도원에 대한 방송이 종종 언급되길래 영상을 찾아보았다. 아무 사전 지식 없이 보기 시작해서일까? 마치 중세의 수도사들같이 뾰족한 후드가 달린 긴 사제복을 입은 한국인과 외국인 사제들의 모습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자막이 줄곳 이어지며 설명을 하는데 사제들의 목소리는 처음 이십여분은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의 대화가 없는 다큐멘터리라니! 하다 못해 우주나 동물 다큐멘터리도 내레이션이 깔리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게 의도된 연출이 아닌 사제들의 일상임을 알고는 더 충격에 빠졌다. 주일 점심 식사 후와 월요일의 4시간여의 산책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제들이 침묵 속에서 생활한다고 한다. 심지어 부엌에서 두 명이 일을 해도 서로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그저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할 뿐이었다.
검색해보니 모든 봉쇄수도원이 다 이렇게 침묵과 고독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카르투시오회가 침묵과 고독의 삶을 엄격하게 지향하고 있는 반면에 다른 봉쇄수도원들은 수도원간의 교류도 활발하고 휴가도 가질 수 있다고 한다. 카르투시오 수도원에서는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면서, 침묵과 고독 속에서 묵상을 하면서 살아가는 11명의 사제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중 6명은 한국인들이었는데 산책 중 서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보니 어찌 보면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선하고 성실한 인상의 분들이었다. 하지만 그분들의 눈빛과 웃음소리는 어린아이처럼 깨끗하고 맑아서, 침묵과 고독에서의 생활이 그들의 영혼을 정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한 눈에도 알 수 있었다. 밥은 하루에 한 끼. 흰쌀밥만 먹거나 나물 반찬 하나를 곁들이는 소박한 식사를 한다. 영양 균형이 좀 걱정될 정도. 신발이나 시계는 수도원에 들어올 때 가지고 온 것들을 쭉 고쳐서 사용해서인지 많이 낡았지만 너무도 정갈하고 빛나 보였다. 인터넷, 텔레비전, 라디오도 사용하지 않고 일 년에 두 번 가족의 면회만 허용되며, 가족의 부고를 들어도 수도원을 떠나지 않는 것이 규칙이다. 방문한 가족과 재회하는 한국인 사제의 모습을 잠깐 보여줬는데 가족이 왔다고 해서 같이 식사를 하거나 한 방에서 자지 않는다고 한다. 산책과 미사 같은 공동체 활동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뒤뜰이 딸린 숙소에서 혼자서 기도, 묵상과 밭 일을 하는 봉쇄 수사와 수도원 전반의 관리와 살림을 담당하는 평수사로 나뉘어 있는데 처음에 둘 중에 한 길을 선택한 후에는 변경할 수 없다고 한다.
한국인 봉쇄수사의 방에 카메라가 따라 들어가는 장면이 있었다. 방 한편에 기도하는 공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이 보였는데 기도를 하면서도 소리가 들리지 않게 입술만을 움직이며 침묵을 유지했다. 벽에 붙여진 십자가가 인상적이었는데 하얀 종이에 볼펜으로 그린 두 줄의 십자가였다. 나무로 만든 십자가도 아닌, 궁극의 청빈, 미니멀리즘이었다.
다큐멘터리의 연출인 건지, 아니면 수도원 측이 제시한 조건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사제들의 모습과 대화는 철저히 관찰자의 시점으로만 보인다. 모든 대화는 사제들 간의 대화이고 인터뷰 형식으로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외국인 사제들이 한국어를 연습하거나 대화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거의 매일 침묵 속에서 지내는데 언제 한국어를 배울 틈이 있나 싶다. 대부분 기본적인 대화만 가능한 수준인 것 같았는데 그중에도 유창하게 한국어를 구사하는 한 분이 있어서 신기했다.
아직 1화까지밖에 보지 못했지만 새해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보기에 정말 유익한 내용인 것 같다. 영적인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 세상의 편리함과 욕망을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뿐인데도 내 마음까지 깨끗해지고 차분해진다. 무분별하게 내 욕심에 휘둘리고 다른 사람들과 나 자신을 비교하며 시간이 쫓겨 허덕이며 사는 내 삶을 돌아보게 된다. 저렇게 살 수도 있구나. 생각 없이 집착했던 고정관념들을 버릴 수 있는 한 해가 되길 바라본다.
종이 십자가 이미지를 검색하다가 다큐멘터리 3화 내용을 꼼꼼히 잘 정리한 블로그를 발견했다. 자막으로 나오는 카르투시오 헌정을 읽고 싶다면 여기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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