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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멀리즘] 종이와의 전쟁단상 2020. 9. 5. 17:17
수년 전에 인상 깊게 본 비디오가 있다. 췌장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미국인 교수가 한 시간 관리에 대한 강의인데,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적도로 활력과 유머가 넘쳤다. 자신에게 남은 얼마 안 되는 시간을 쪼개서 조카들이 다니는 대학에서 강연을 하는 사랑과 여유에 깊게 감명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 만큼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엄청난 삶의 무게가 느껴졌고 집중해서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중 특히 기억에 남는 말이 '모든 종이는 단 한 번만 만져라'이다. 그 말을 듣고 난 후 방 정리를 할 때면 종이는 바로 정리하거나 재활용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아니, 몇 번은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기억이 가물가물해지고, 다시 내 책상에는 종이가 쌓이기 시작했다. 자칭 미니멀리스트이고, 수년에 걸쳐서, 옷장, 책, 잡동사니, 학용품 등 많은 것을 처분하고 있다. 꽤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내 책상 위에 종이 쪼가리들이 쌓여가고 있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다 보니 종이들이 마치 자석처럼 다른 종이 쪼가리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종이들이 쌓여가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종이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종이들을 분류해보니 대충 네 가지 종류였다.
1. 필사한 종이: 책이나 인터넷에서 맘에 드는 문구를 베꼈어 둔 종이와 공책들.
2. 일기처럼 메모해둔 강렬한 생각이나 좋은 아이디어들.
3. 중국어 수업 중에 필기해둔 종이/공책
4. 이면지 - 반대쪽은 다소 개인적이 내용이 적혀있거나, 좋은 질의 종이
다행히 종이는 재활용이 가능한 자원이다. 그럼에도 내가 저 종이들을 한 뭉치로 모아서 재활용함에 넣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 필사한 종이: 내가 기억하고 싶은 내용을 필사한 경우가 많다. 다시 읽어봐도 좋은 내용이라 컴퓨터에 저장하고 싶다. 나중에 시간 나면 타이핑해야지 --> 종이는 또 방치된다.
2. 일기처럼 메모해둔 강렬한 감상이나 좋은 아이디어들. 다시 읽어봐도 좋은 내용이라 컴퓨터에 저장하고 싶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시간이 없으니까 나중에 타이핑해야지 --> 종이는 또 방치된다.
3. 중국어 수업 중에 필기해둔 종이/공책 --> 활용도가 높은 예문들이 많아서 복습하고 싶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시간이 없으니까 나중에 공부해야지 --> 종이는 또 방치된다.
4. 이면지 - 그냥 재활용하기에 종이가 너무 멀쩡하다. 나중에 시간 날 때 여기다 필사하거나 한자 연습해야지 --> 종이는 또 방치된다.
이렇게 쓰고 보니, 쌓여가는 종이는 나의 미루기와 저장 강박이 3D로 구현된 것이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1. 필사: 필사가 주는 손맛은 참으로 달콤하다. 시간 여유가 있을 때 글씨를 예쁘게 쓰려고 신경 쓰면서 맘에 드는 글귀를 베껴 쓰는 그 기분은, 어린 시절 순수하게 배움을 즐겼던 시간으로 날 잠시 돌려보내 준다. 현명한 사람들의 지혜가 꼭꼭 눌러 담긴 글을 음미하다 보면 내가 조금은 똑똑해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이후, 그 종이를 바로 처리하지 않으면 오늘과 같이 스트레스의 원인으로 전락하게 된다. 사실 그 글을 쓰는 순간과 종이를 처분하기 전 한 번 더 읽게 되는 것뿐인데, 뭐가 그리 소중하다고 보관했는지 모르겠다. 앞으로는 컴퓨터에 직접 저장하거나, 필사를 하고 바로 처리하기로 결심해다. 다시 보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더 열심히 읽고 음미하고 외우게 되지 않을까? (방금 이 포스팅을 잠시 멈추고 필사해둔 것을 컴퓨터에 옮겨 적고 있는데, 그 당시에는 분명히 베껴 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었을 글귀 중 상당수는 이제 그리 빛나 보이지 않는다. 두 번이나 필사/타이핑할 가치가 있는 글은 생각보다 많이 않은 듯하다)
2. 일기처럼 메모해둔 강렬한 감상이나 좋은 아이디어들 -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컴퓨터를 켜는 것보다 종이에 휘갈겨 쓰는 것이 더 빠를 때가 있다. 그럴 경우에는 하루에 한 번이나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에버노트나 클라우드 서비스에 저장해놓자. 그리고 종이는 재활용함에 처분할 것.
3. 중국어 수업 중에 필기해둔 종이/공책: 공책에 필기한 것을 다시 옮겨 적으면 확실히 좋은 복습이 되긴 한다. 나중에 찾아보기 쉽도록 공책에 정리해 놓는 것도 좋지만, 빨리 검색하기에는 타이핑을 해서 파일로 저장을 하는 것이 빠르다. Control+f를 활용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중국어 타이핑도 연습할 겸 이제부터는 노트 필기 후 바로 타이핑하면서 복습하기로 결심!
4. 이면지 - 낭비되는 종이가 너무너무 아깝다 ㅠㅠ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쌓이는 종이를 보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건강한 방법은 아니다. 일단 재활용함에 종이를 넣어두고 가득 찰 때까지는 그 속의 종이에 메모를 하거나 한자 연습을 한 다음 꽉 차면 재활용함을 비우기로 해야겠다. 종이 낭비에 대한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는 앞으로는 프린트할 때 신중하게 생각하기로 결심!
이 포스팅을 하다 말고, 필사해두었던 종이들을 파일로 옮기고 재활용을 했다. 이면지는 재활용함에 일단 넣어두니 책상이 아주 약간 정리가 되었다. 중국어 수업 복습도 해야 하지만 오늘은 일단 이 정도 정리한 것만으로도 나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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